[작성자:] 청풍

  • 교실에서 반복되는 무의식은 무엇일까?

    늘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교실은 해마다 새로운 학생을 맞이한다.
    구성원은 달라지지만, 분위기는 어딘가 익숙하다.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이 있고, 지나치게 조용한 학생이 있다.
    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이유 없이 교사에게 날을 세우는 아이도 있다.

    교사 역시 매년 비슷한 감정을 경험한다.
    어떤 학생에게는 유난히 예민해지고, 어떤 학생에게는 과하게 마음이 쓰인다.

    사람은 바뀌는데 장면은 반복된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교실은 감정이 먼저 움직이는 공간이다

    우리는 교실을 지식 전달의 장소로 이해한다.
    하지만 실제로 교실을 움직이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감정이다.

    학생은 교실에 들어올 때, 교과서만 들고 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과거 경험을 함께 들고 온다.

    인정받지 못했던 기억,
    지적받을 때마다 위축되었던 순간,
    권위자에게 반항하고 싶었던 감정.

    이 모든 것이 현재의 교사와 만나면서 다시 작동한다.
    이것이 교실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이다.


    학생은 교사에게 과거를 옮긴다

    어떤 학생은 사소한 지적에도 크게 위축된다.
    또 어떤 학생은 이유 없이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이 반응은 단순한 태도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학생은 현재의 교사를 대하고 있지만, 동시에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과거의 부모,
    과거의 교사,
    자신을 평가하던 권위자.

    이처럼 과거의 감정이 현재 인물에게 옮겨오는 현상을 전이라고 한다.
    교실은 그래서 과거 관계가 다시 연출되는 무대가 된다.


    교사 역시 자유롭지 않다

    무의식은 학생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사도 자신의 과거를 가지고 교실에 선다.

    유독 신경이 쓰이는 학생이 있다.
    설명하기 어려운 거부감이 드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과하게 보호하고 싶은 학생도 있다.

    그 감정은 현재 상황만으로 설명되지 않을 수 있다.
    학생이 교사의 어린 시절 모습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고,
    과거의 상처를 건드릴 수도 있다.

    이때 교사는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
    이를 역전이라고 부른다.

    교실은 학생과 교사의 무의식이 동시에 작동하는 공간이다.


    집단은 역할을 만들어 낸다

    교실에는 늘 비슷한 유형이 등장한다.
    ‘문제아’, ‘모범생’, ‘분위기 메이커’.

    흥미로운 점은 이 역할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집단은 긴장을 분산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특정 역할을 맡긴다.

    한 학생이 계속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개인의 성향만이 아니라 집단 전체의 불안을 떠안은 결과일 수 있다.

    교실은 하나의 심리적 구조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구조는 쉽게 반복된다.


    교육은 반복을 인식하는 일이다

    이 모든 장면을 단순히 ‘지도력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교실에서 반복되는 갈등은 종종 무의식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교사의 역할은 모든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반복을 알아차리고, 그대로 재연하지 않는 것이다.

    화가 나는 순간 잠시 멈추는 것.
    특정 학생을 쉽게 규정하지 않는 것.
    “왜 이 장면이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질까?”를 묻는 것.

    그 작은 성찰이 반복의 흐름을 바꾼다.


    교실은 관계의 공간이다

    교실은 배움의 공간이기 전에 관계의 공간이다.
    그리고 관계는 언제나 과거와 현재가 겹쳐진 자리에서 만들어진다.

    무의식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같은 장면을 조금 다르게 만들 수 있다.

    어쩌면 교육이란 새로운 지식을 더하는 일이 아니라,
    오래된 반복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 실패를 배움으로 바꾸는 즐거움: 아이들과 함께 실험하는 시간

    실패는 배움의 시작

    아이들이 무언가를 시도하다 실패하면, 우리는 종종 “안 되네”라고 한숨을 쉰다.
    하지만 잠시 멈춰보면, 실패는 생각보다 훨씬 큰 선물일 수 있다.

    실패가 가져다주는 가장 중요한 선물은 배움의 시작점이라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실수할 때, 그들은 질문을 만들고, 원인을 찾아보고, 다시 시도한다.
    단순히 정답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기르는 순간이다.

    실험을 예로 들어보자. 색깔을 섞어 새로운 색을 만들거나, 작은 로봇을 움직이게 하는 활동에서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질문을 한다.
    “왜 이렇게 되었지?”
    “다른 방법을 시도하면 어떨까?”
    바로 이 질문이 배움의 씨앗이다.


    오류와 실패가 주는 학습의 가치

    오류는 단순히 ‘틀린 답’이 아니다.
    아이들에게는 탐구의 기회다.

    아이들은 실패 속에서 원인을 분석하며, 다양한 해결책을 시도한다.
    때로는 실수 때문에 웃고, 때로는 당황하지만, 그 과정에서 창의적 사고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작은 실수 하나도, 아이들에게는 자기 주도적 학습의 밑거름이 된다.

    실패는 불편할 수 있지만, 반복되는 시도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만의 학습 전략을 만들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판단하고 도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안전한 실패 경험을 위한 교사의 역할

    실패가 배움으로 이어지려면, 환경과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아이들이 실수로 주눅 들지 않도록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결과보다 과정을 바라보고, 질문과 피드백으로 아이들의 사고를 확장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블록 구조물을 쌓다 무너뜨렸을 때,
    “왜 무너졌을까?”
    “다음에는 어떻게 다르게 쌓아볼 수 있을까?”
    같은 질문을 던지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점을 찾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실수 자체를 평가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이다.
    실패가 불안이나 두려움이 아닌, 배움의 기회로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실패를 통한 성장과 미래교육

    반복되는 실패 경험은 아이들의 창의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높인다.
    자기 성찰과 개선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점점 더 자신감 있게 탐구하고 시도한다.

    미래교육은 정답보다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강조한다.
    아이들이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경험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미래 사회에서 필요한 핵심 역량을 기르는 과정이다.

    실수와 도전이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아이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하고, 배움을 즐기는 법을 배우게 된다.
    교사는 아이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탐구할 수 있도록 돕는 촉진자 역할을 맡는다.
    그 과정에서 교사도 아이들과 함께 배우며 성장한다.


    마무리: 실패와 함께 배우는 즐거움

    아이들이 실패를 경험할 때, 우리는 잠시 뒤로 물러서서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조용히 질문을 던지자.
    “이번 경험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다음에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실패는 아이들을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과 성장의 신호가 된다.
    작은 시도와 반복 속에서, 아이들과 교사는 함께 배우고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도 아이들의 작은 실패와 성공 속에서, 배움의 즐거움과 성장의 순간을 함께 경험하길 바란다.

  • “좋은 교사”가 되고 싶을수록 힘든 이유― 초자아와 교사의 이상화

    들어가는 말

    “나는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

    아마 교직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아니 수없이 되뇌었을 문장일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왜 때때로 우리를 성장시키는 대신,
    지치게 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만들까?


    우리가 마음속에 그려놓은 ‘좋은 교사’

    좋은 교사는 어떤 사람인가?

    아이를 끝까지 기다려주는 사람.
    늘 따뜻한 말로 반응하는 사람.
    감정을 잘 조절하는 사람.
    수업 준비를 철저히 하는 사람.
    아이 한 명 한 명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

    이상적인 교사상은 대개 흠이 없다.
    거기에는 피곤함도, 짜증도, 한계도 없다.

    문제는 그 이상적인 이미지가
    어느 순간 ‘기준’이 되고,
    더 나아가 ‘명령’이 된다는 점이다.


    초자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초자아(superego)는
    내 안의 도덕적 기준이자, 금지와 명령의 목소리다.

    “그렇게 하면 안 돼.”
    “넌 더 잘해야 해.”
    “왜 그것밖에 못 했니?”

    초자아는 사회적 규범, 부모의 기대, 교사상, 전문직 윤리 등을 내면화한 결과다.
    교사에게는 이 초자아가 특히 강하게 형성되기 쉽다.

    왜냐하면 교사는
    ‘모범’이 되어야 하고,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며,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사는 실수했을 때
    단순히 “오늘 좀 힘들었네”라고 넘기지 못한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왜 그 순간 아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더 성숙하게 반응하지 못했을까.”

    이때 초자아는 조용히 속삭인다.

    “좋은 교사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이상화가 만들어내는 과도한 자기 비판

    이상화(idealization)는 어떤 대상을 완벽하게 그려내는 심리적 과정이다.
    우리는 종종 ‘좋은 교사’를 이상화한다.

    문제는 그 이상이 너무 높을 때다.

    이상은 방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상이 ‘절대적 기준’이 되면,
    현재의 나는 언제나 부족한 존재가 된다.

    수업이 조금만 흔들려도
    아이와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겨도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이 있어도

    “나는 아직 멀었다.”
    “나는 좋은 교사가 아니다.”

    이런 생각이 반복된다.

    자기 성찰은 성장의 출발점이지만,
    과도한 자기 비판은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번아웃과 죄책감의 연결

    흥미로운 것은,
    교사들이 지칠수록 오히려 죄책감이 커진다는 점이다.

    “아이들 앞에서 이렇게 힘들어하면 안 되는데.”
    “나는 이 일을 선택했는데 왜 이렇게 버겁지?”
    “아이들은 잘못이 없는데…”

    이 죄책감 역시 초자아의 목소리다.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
    항상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기대,
    전문가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기준.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을 밀어붙이다 보면
    어느 순간 정서적 에너지가 고갈된다.

    번아웃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지나치게 이상화된 자기 기준과
    현실의 나 사이의 간극이 커질 때 생기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상을 버려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문제는 이상이 아니라
    그 이상을 대하는 방식이다.

    정신분석학자 위니컷은 “충분히 좋은 어머니(good enough mother)”라는 표현을 썼다.
    완벽한 어머니가 아니라, 충분히 좋은 어머니.

    교사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완벽한 교사가 아니라,
    충분히 좋은 교사.

    실수할 수 있고,
    감정이 흔들릴 수 있고,
    모든 아이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교사.

    초자아의 목소리가 들릴 때
    그것을 완전히 따르거나, 완전히 억누르기보다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이 기준은 나를 성장시키는가,
    아니면 나를 압박하고 있는가?”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의 이면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아이를 향한 진심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이
    자기 처벌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가끔 멈춰 서야 한다.

    나는 오늘 완벽했는가?
    보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나 자신에게도 충분히 인간적이었는가?

    좋은 교사를 향한 길은
    아이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혹시 오늘도
    “나는 왜 이 정도밖에 못 했을까”라고 생각했다면,
    그 문장 뒤에 조용히 덧붙여보자.

    “그래도 나는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그 문장이
    초자아의 목소리를 조금은 부드럽게 만들지 모른다.

  • 감정이 설계되지 않은 창의성 교육의 실패

    창의성은 안전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흔히 창의성을 능력의 문제로 생각한다.
    아이디어가 많으면 창의적이고, 사고가 빠르면 창의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창의성 교육은 늘 사고력 훈련, 발상 기법, 문제 해결 전략에 집중된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은 빠져 있다.

    그 아이는, 그 학생은, 그 교실은 안전한가?

    창의성은 재능이 아니라 감정 상태에서 시작된다.
    정서적으로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않는다.


    두려움은 사고를 좁힌다

    불안과 두려움은 학습을 방해하는 감정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학습의 방향을 바꾼다.

    두려움을 느낄 때 인간의 뇌는 생존 모드로 전환된다.
    이때 뇌는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기보다
    위험을 피하고, 틀리지 않는 선택을 우선시한다.

    즉, 두려움은 사고를 수렴시키고
    창의성에 필요한 확산적 사고를 차단한다.

    “틀리면 안 돼.”
    “시험에 나오는 것만 해.”
    “빨리 답해.”

    이 말들은 아이를 게으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뇌를 조심스럽게 만든다.
    조심스러운 뇌는 창의적일 수 없다.


    호기심은 안전이 허용할 때 생긴다

    우리는 질문을 지능의 결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질문은 감정의 결과다.

    호기심은 안전이 전제될 때만 작동하는 감정이다.
    실패해도 괜찮고, 엉뚱해도 괜찮고,
    당장 정답이 없어도 괜찮다는 느낌이 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질문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질문이 많은 교실은
    아이들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허용된 공간일 가능성이 높다.

    질문은 가르쳐서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허용될 때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평가받는 환경에서 상상력은 줄어드는가

    대부분의 교육 환경은 끊임없이 평가한다.
    비교하고, 순위를 매기고, 결과를 수치화한다.

    이 구조 속에서 아이들은 배우기 시작한다.
    “생각하는 것”보다
    “틀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평가 중심 환경은
    아이를 질문하는 존재가 아니라
    정답을 찾아내는 존재로 만든다.

    그래서 많은 창의성 교육이 실패한다.
    프로그램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교재가 낡아서도 아니다.

    감정 설계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창의성은 기술이 아니라 조건이다

    창의성은 가르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만들어줘야 할 조건이다.

    안전한 감정,
    실패해도 괜찮다는 신호,
    비교되지 않는 경험,
    질문이 환영받는 분위기.

    이 조건이 마련될 때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탐색하고, 연결하고, 상상한다.

    우리는 창의성을 가르치려 하지만
    정작 창의성이 자라날 감정 환경을 설계하지 않는다.

    창의성은 훈련의 결과가 아니라
    안전의 부산물이다.

  • 학생은 교사를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 지식 말고, 태도

    들어가며

    수업이 끝난 뒤에도 학생에게 오래 남는 것은
    대개 설명한 개념이나 공식이 아니다.
    오히려 잘 기억되지 않는 것들—
    교사가 말을 멈추던 순간, 질문을 받아들이던 표정,
    당황했을 때의 숨 고르기 같은 것들이다.

    학생은 교사를 통해
    지식을 배우기보다 사람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배운다.


    전이는 수업 안에서 이미 일어난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전이는
    치료실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권위가 있고, 평가권을 지니고 있으며,
    말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 앞에서
    전이는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교사는 학생에게

    • 어떤 부모였고
    • 어떤 어른이었고
    • 어떤 ‘기대의 대상’이었는지를
      겹쳐서 불러온다.

    그래서 학생의 반응은 종종
    수업 내용과 정확히 비례하지 않는다.
    과도하게 잘 따르거나, 이유 없이 반항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위축되기도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전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교사가 어떤 태도로 존재하느냐이다.


    동일시는 설명이 아니라 ‘방식’을 향한다

    학생은 교사의 지식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는다.
    대신 교사가 지식을 다루는 방식을 동일시한다.

    • 모르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 실수를 했을 때 변명하는지, 인정하는지
    • 감정이 올라왔을 때 말을 멈추는지, 밀어붙이는지

    이 모든 것이
    학생에게는 하나의 모델이 된다.

    그래서 어떤 수업에서는
    학생이 “이 문제를 이렇게 풀어라”는 말보다
    “아, 저렇게 생각해도 되는구나”를 배운다.

    동일시는 내용이 아니라
    리듬과 태도를 향해 일어난다.


    교사의 말투와 리듬은 교육의 숨결이다

    같은 말을 해도
    누군가의 수업은 숨이 막히고,
    누군가의 수업은 숨이 트인다.

    그 차이는 말의 난이도가 아니라
    말투와 리듬에 있다.

    • 급하게 몰아붙이는 말
    • 여백 없이 채워 넣는 설명
    • 질문이 나오기 전에 닫혀버리는 결론

    이런 리듬 속에서 학생은
    ‘생각해도 되는 시간’을 잃는다.

    반대로
    말 사이에 여백이 있고,
    감정이 올라오면 잠시 멈출 줄 아는 교사 앞에서
    학생은 사고를 안전하게 확장한다.

    교육은 말의 양이 아니라
    말이 놓이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감정을 처리하는 교사의 모습이 곧 수업이다

    교사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감정의 유무가 아니라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다.

    • 짜증을 농담으로 흘려보내는지
    • 불안을 통제로 바꾸는지
    • 무력감을 침묵으로 견디는지

    학생은 그 장면을 통해
    “어른은 감정을 이렇게 다루는구나”를 배운다.

    어쩌면 학생에게 가장 중요한 수업은
    교사가 감정을 망치지 않고 통과시키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수업은 인격의 흔적이다

    아무리 교안을 잘 짜도,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수업에는 교사의 인격이 남는다.

    정확함보다 태도가,
    완성도보다 존재 방식이
    더 오래 전해진다.

    그래서 수업은
    기술이기 이전에 관계의 사건이고,
    교육은 전달이 아니라 동행의 흔적이다.


    맺으며

    학생은 교사를 통해
    지식을 배우는 동시에
    “어떻게 살아도 되는가”를 배운다.

    그것은 교사가 의도하지 않아도 전해지고,
    통제하지 않아도 남는다.

    그래서 어쩌면
    좋은 수업이란
    완벽한 설명이 아니라,

    학생이 자기 방식으로 생각해도 괜찮다고
    느끼게 되는 시간
    일지도 모른다.

  • AI 시대의 교육, 우리는 무엇을 다시 배워야 하는가

    AI는 교육을 위협하는가, 아니면 교육을 폭로하는가

    AI는 교육을 무너뜨리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교육이 무엇을 해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거울에 가깝다.

    지식을 설명하고
    문제를 풀고
    정답을 평가하는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동화 가능한 활동’이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명확해진 것이다.

    AI의 등장은 묻는다.
    “그동안 교육은 인간에게 무엇을 남겨왔는가?”


    우리는 ‘배움’이 아니라 ‘적응’을 가르쳐왔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가장 많이 배운 것은
    사실 지식이 아니라 환경에 맞게 자신을 조정하는 법이었다.

    • 시험에 맞게 공부하는 법
    • 평가 기준을 눈치채는 법
    • 실수하지 않는 말하기
    • 튀지 않는 태도

    이 모든 것은 학습이 아니라 적응 훈련에 가깝다.

    AI는 이 적응을 훨씬 더 잘한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적응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교육은 방향을 바꿔야 한다.
    ‘환경에 맞추는 법’이 아니라
    ‘환경을 해석하고 선택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AI 시대의 핵심 역량은 ‘선택 능력’이다

    정보가 부족한 시대에는
    ‘아는 것’이 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가 과잉인 시대다.

    이제 중요한 것은

    • 무엇을 더 알 것인가가 아니라
    • 무엇을 선택하지 않을 것인가다.

    AI는 수많은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그중 무엇이 나에게 중요한지는 결정하지 못한다.

    교육은 앞으로
    학생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보여주는 대신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너는 왜 이 선택을 하려 하는가?”

    이 질문은 계산이 아니라 사유를 요구한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의미 만들기’다

    AI는 결과를 만들어내지만
    의미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같은 성과라도

    • 어떤 사람에게는 성장이고
    • 어떤 사람에게는 소모일 수 있다.

    교육이 다뤄야 할 것은
    성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성과가 개인의 삶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다.

    이때 교육은 더 이상
    기술 전달의 장이 아니라
    삶을 해석하는 연습의 장이 된다.


    실패를 제거하는 교육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기존 교육은 실패를 최소화하려 했다.

    • 정답 중심 평가
    • 빠른 수정
    • 실수의 즉각적 교정

    하지만 AI는 실패하지 않는다.
    실패하지 않는 존재와 경쟁하는 순간,
    인간은 실패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AI 시대의 교육은
    실패를 제거하는 대신
    실패를 해석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 왜 이 실패가 나에게 중요했는가
    • 무엇을 잃었다고 느끼는가
    • 이 경험이 나를 어디로 밀어내는가

    이 질문들은 속도를 늦춘다.
    그리고 그 느림 속에서 인간의 사유가 시작된다.


    교육은 더 이상 ‘미래 대비 훈련’이 아니다

    AI 시대에 자주 나오는 말이 있다.
    “미래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미래가 너무 빠르게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은
    특정 미래를 대비시키는 역할을 내려놓아야 한다.

    대신 교육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 불확실성을 견디는 힘
    • 기준이 흔들릴 때 판단하는 힘
    • 타인의 기대와 자신의 욕망을 구분하는 힘

    이것은 기술이 아니라 내적 기준의 문제다.


    AI 시대의 교육은 인간을 늦추는 일이다

    AI는 인간을 앞질러 가고 있다.
    그래서 교육은 더 빨라질 수 없다.

    오히려 교육은

    • 멈추게 하고
    • 질문하게 하고
    • 생각을 보류하게 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교육은 이제 묻는다.

    “지금 이 선택을
    정말 네가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때,
    교육은 여전히 인간의 편에 서 있다.

  • 감정은 왜 늘 교육에서 밀려날까

    교육은 언제부터 ‘감정을 다루기 불편해졌을까

    교육은 원래 인간 전체를 다루는 일이었다.
    아는 것,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그리고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교육은 점점 측정 가능한 것들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성취도, 점수, 결과, 속도, 효율.

    감정은 그 과정에서 늘 불편한 존재였다.
    보이지 않고, 수치화하기 어렵고,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정은 종종 “다루기엔 복잡한 것”,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밀려났다.

    하지만 정말 감정은 교육의 바깥에 있어도 되는 것일까?


    감정은 학습의 방해물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감정은 결코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다.
    감정은 학습이 시작되는 자리다.

    아이들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 무언가를 반복해서 묻는 이유,
    혹은 갑자기 공부를 거부하는 이유에는 늘 감정이 있다.
    불안, 두려움, 인정받고 싶은 욕구, 실패에 대한 공포, 관계 속 긴장.

    이 감정들이 이해되지 않은 채
    “왜 집중을 못 하니”, “왜 이렇게 느리니”, “왜 의욕이 없니”라는 말만 반복될 때
    아이의 학습은 멈춘다.

    감정은 억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해석되어야 할 신호다.


    교실에서 가장 자주 무시되는 감정, ‘불안’

    학교 현장에서 가장 흔하지만 가장 말해지지 않는 감정은 불안이다.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사 역시 불안을 안고 교실에 들어선다.

    • 잘 가르치고 있는지에 대한 불안
    •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

    이 불안이 말로 다뤄지지 않을 때,
    대신 규칙이 강화되고, 평가가 늘어나고, 통제가 앞선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불안을 견디지 못할 때 나타나는 방어로 본다.
    교육 현장에서 감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정이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을 다루는 교육은 ‘느슨한 교육’이 아니다

    감정을 이야기하면 흔히 따라오는 오해가 있다.
    “그러면 기준이 무너진다”,
    “아이들에게 너무 맞춰주는 교육 아니냐”는 말이다.

    하지만 감정을 다룬다는 것은
    규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회복하는 일이다.

    왜 이 규칙이 필요한지,
    왜 이 과정이 중요한지,
    왜 실패가 배움의 일부인지.

    감정을 통해서만
    아이들은 규칙과 배움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엄격함과 따뜻함은 반대가 아니다.
    감정을 배제한 엄격함이 오히려 가장 취약하다.


    감정을 다루는 교사는 ‘치료자’가 아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교육에서 감정을 다룬다고 해서
    교사가 아이를 치료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분석적 관점은
    아이의 감정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해 가능한 언어로 옮겨주는 것에 가깝다.

    “왜 그런지 말해도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지금은 힘든 시기일 수 있어”

    이 짧은 말들이
    아이에게는 자기 감정을 부정당하지 않는 경험이 된다.
    그리고 이 경험이 쌓일 때
    학습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감정을 잃은 교육은 결국 관계를 잃는다

    교육은 결국 관계의 일이다.
    지식은 관계를 통해 전달되고,
    성장은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감정을 배제한 교육은
    아이를 ‘대상’으로 만들고,
    교사를 ‘관리자’로 만든다.

    하지만 감정을 포함한 교육은
    교사와 학생을 다시 사람으로 만나게 한다.

    성과는 느릴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결과는 늦게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배움은 오래간다.


    교육은 다시 감정을 불러와야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교육은 감정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질문해봐야 한다.
    교육은 왜 감정을 버려야 했을까?
    그리고 그 대가는 무엇이었을까?

    감정을 다시 교육 안으로 들여오는 일은
    퇴보가 아니라 회복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가르치려는 가장 오래된 시도로 돌아가는 일이다.


    마무리하며

    교육은 빠른 성과를 좋아한다.
    하지만 인간의 성장은 언제나 느리다.
    감정은 특히 그렇다.

    그 느림을 견디는 것이
    어쩌면 오늘날 교육이 가장 필요로 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 교육은 왜 늘 결과만 보고 과정을 잃어버릴까

    결과로 말해지는 교육의 언어

    교육 현장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말은 성과, 결과, 성취다.
    얼마나 빨리 읽는지, 얼마나 정확히 쓰는지, 무엇을 해냈는지.
    아이의 배움은 늘 숫자와 목록으로 정리되고, 과정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배움은 원래 시간이 걸리고, 흔들리고, 돌아가기도 하는 일인데
    교육은 왜 이렇게 결과를 서둘러 요구하게 되었을까.


    결과 중심 교육이 만들어낸 효율성의 함정

    결과 중심 교육은 효율적이다.
    평가하기 쉽고, 비교하기 쉽고, 설명하기 쉽다.
    그래서 제도는 자연스럽게 결과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이 효율성은 아이의 내적 경험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아이는 무엇을 느꼈는지, 어디에서 막혔는지, 왜 멈췄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해냈는가’ 혹은 ‘못 해냈는가’만 남는다.


    정신분석이 바라보는 배움의 관점

    정신분석은 늘 결과보다 과정을 본다.
    무엇을 선택했는지보다, 왜 그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어디에서 욕망이 생기고 어디에서 멈추었는지를 묻는다.

    아이의 배움도 마찬가지다.
    배움의 과정은 단순한 연습의 시간이 아니다.
    그 안에는 좌절, 불안, 기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함께 얽혀 있다.


    과정이 지워질 때 아이에게 남는 것

    과정을 지워버린 교육은 이 감정들을 다루지 못한 채 결과만 요구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는 실패를 배움의 일부로 경험하지 못한다.
    실패는 곧 ‘능력 없음’이 되고, 과정은 기억에서 사라진다.

    결과만 남은 자리에서 아이는 점점 시도하지 않게 된다.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평가받는 대상으로 자신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과정이 사라진 교육이 만드는 정체성

    교육이 과정을 잃어버릴수록 아이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나는 어떻게 배우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나는 잘하는 사람인가 아닌가’로 자신을 정의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학습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의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문제다.


    어른이 되어서도 반복되는 결과 중심 사고

    사실 많은 어른들도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
    학교를 떠난 뒤에도 우리는 결과로 자신을 평가한다.
    얼마나 성취했는지, 얼마나 앞서 있는지, 무엇을 증명했는지.

    과정에서 겪은 감정들은 말해지지 않고
    혼자 견뎌야 할 몫으로 남는다.


    과정을 다시 교육의 중심에 놓는다는 것

    그래서 교육에서 과정을 다시 이야기하는 일은 중요하다.
    과정을 존중한다는 것은 느린 속도를 허용하는 것이고,
    흔들림을 실패로 보지 않는 것이며,
    멈춤도 배움의 일부로 인정하는 일이다.

    과정을 존중하는 교육은 아이를 보호한다.
    아이를 결과 이전의 존재로 바라보게 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충분히 배우고 있는 존재로.


    교육이 지켜야 할 마지막 자리

    교육이 결과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만 남기고 과정을 지워버리는 순간
    교육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잃는다.

    배움은 언제나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은 그 과정을 보존하는 것이다.
    아이의 속도, 아이의 흔들림, 아이의 질문이 사라지지 않도록.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남기는 교육

    어쩌면 교육의 본질은
    결과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과정이 사라지지 않게 지켜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 감정을 ‘관리’하려는 교육의 역설

    — 감정 교육이 왜 아이들을 더 불안하게 만드는지

    들어가는 말

    요즘 교육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감정’이다.
    아이의 감정을 존중해야 한다, 감정 표현을 가르쳐야 한다, 감정 조절 능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들.
    듣기에는 다 맞는 말 같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감정 교육에는 묘한 모순이 있다.
    감정을 존중하겠다고 시작했는데, 결국 감정을 관리하려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점이다.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다뤄야 할 것’이 될 때

    교육 현장에서 자주 듣는 말들이 있다.
    “지금 어떤 감정이야?”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해볼까?”
    “화가 날 땐 이렇게 해보자.”

    이 말들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반복되면, 아이는 어느 순간 이렇게 느끼기 시작한다.

    감정은 빨리 알아차려야 하고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결국에는 정리되어야 하는 것

    감정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사라지는 경험이 아니라,
    관찰되고 점검받는 대상이 되어버리는 순간이다.


    아이들은 감정을 느끼기 전에 ‘정답’을 먼저 떠올린다

    감정 교육이 강화될수록, 어떤 아이들은 오히려 감정 표현을 더 어려워한다.
    슬픈데도 슬프다고 말하지 못하고,
    화가 나 있는데도 “이 상황에서 화내면 안 될 것 같아”라고 느낀다.

    왜 그럴까?

    아이들은 점점
    “이 감정이 맞는 감정일까?”
    “지금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맞게 표현해야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감정은 조절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다

    감정은 혼자서 생기고 혼자서 해결되는 게 아니다.
    감정은 늘 관계 속에서 생기고,
    관계 속에서 가라앉는다.

    아이의 불안은
    “불안 조절을 해보자”는 말로 줄어들지 않는다.
    누군가 그 불안을 함께 버텨줄 때, 조금씩 괜찮아진다.

    그런데 감정 관리 중심의 교육은 이 과정을 건너뛴다.
    관계를 생략하고,
    아이에게 곧바로 자기 조절의 책임을 맡긴다.


    감정을 잘 다루는 아이는 감정을 적게 느끼는 아이가 아니다

    우리는 종종 감정을 잘 다루는 아이를
    울지 않고, 차분하고, 문제 행동이 없는 아이로 착각한다.

    하지만 감정을 잘 다룬다는 건
    감정을 눌러버리는 능력이 아니다.

    • 울어도 괜찮았던 경험
    • 화를 내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던 기억
    • 불안해도 누군가 옆에 있었던 시간

    이런 경험이 쌓일 때, 아이는 자연스럽게 감정을 다루게 된다.


    감정 교육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에 가깝다

    감정 교육이 정말 필요하다면, 방향은 조금 달라야 한다.

    • 감정을 빨리 정리하라고 하지 않고
    • 반드시 말로 표현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 조절 전략을 먼저 가르치기보다

    아이의 감정 옆에 조금 더 오래 머무는 어른의 태도가 먼저 필요하다.

    “그럴 수 있지.”
    “지금은 말 안 해도 괜찮아.”
    “나는 여기 있어.”

    이런 말들이야말로, 아이에게는 가장 강력한 감정 교육이다.


    우리가 감정을 관리하고 싶어지는 이유

    아이의 감정을 관리하고 싶어지는 순간을 돌아보면,
    그 안에는 어른 자신의 불안이 있는 경우가 많다.

    • 아이가 울면 상황이 통제되지 않을까 봐
    • 감정이 커지면 감당이 안 될까 봐
    • 교실이나 관계가 흔들릴까 봐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빨리 정리하려 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필요한 건 정리가 아니라,
    함께 견뎌주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마무리하며

    감정을 가르치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감정을 관리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자는 이야기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은
    아이를 빨리 안정시키는 게 아니라,
    불안정한 순간에도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남겨주는 것이다.

    감정은 관리될 때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해받을 때 자리를 잡는다.

  • 감정을 넘어선 사고의 기능: 진정한 배움의 의미

    서론

    나는 오랫동안 감정과 나에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 분석을 해 왔다. 화가 난다. 짜증이 난다. 기쁘다. 슬프다. 즐겁다 등의 감정만 오랫동안 써 온 나는 특별히 복잡하고 어렵다고 할만한 감정의 세계를 느껴보지 못했다. 감정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내가 20대 후반 무렵 몸이 아프고 나서부터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슬펐다. 비록 죽을만큼 아픈 병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꿈을 위해 달려왔던 시간을 모두 송두리째 바꾸어버릴 수 있었던 사건이라 나를 너무 무섭고 두렵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병으로 인한 후유증을 받아들이고, 타협했을 무렵부터 나는 나의 깊은 감정에 몰입하게 되었다. 나는 감정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였다. 감정을 잘 풀어서 말할 수도 없었고,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슬픈일이 있어도 눈물이 뚝뚝, 억울한 일이 있어도 눈물이 뚝뚝, 화가나도 눈물이 뚝뚝 모든 것이 눈물이 되어 흘러나왔다. 그 전까지는 감정을 많이 억압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누군가에게 쉽게 털어놓거나 한 적이 별로 없는 상태로 살아왔었던 것 같다. 그 억압이 이제 눈물이 되어 나타나는 구나…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왜 이렇게 감정적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아픔을 치유할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내가 경험한 이 세상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아파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나에게 눈물은 나를 치유해 주는 하나의 선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눈물 속에는 감사, 연민, 슬픔, 억울함, 불안 등이 엉켜져 있었다. 그 누구보다 이 감정들을 해석하고 싶은 사람은 나였으며, 이 불확실한 애매모호함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해석이 쉽게 되지만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이런 나의 눈물을 분석하고 해석한 결과, 내가 정말 좋은 사람임을 깨달아 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나는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지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고, 나는 대신에 정말로 공정하고 올바르게 행동하고자 하는 사람,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사람, 얼마나 타인을 위해 헌신하고 사랑을 주는 사람, 그리고 얼마나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인지 등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결론은 나의 그저 얽혀 어렴풋이 있던 감각이 생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완성되었다. 감각적인 느낌으로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던 나의 감정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때가 되었을 때 나는 나에 대해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 생각해볼 비온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기』라는 책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감정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배움을 확장한다. 감정은 이성적 사고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오랫동안 배척되어온 것이지만, 이는 분명 이해하고 알아나가야 할 인간이 가진 본능 중의 하나이며, 이를 이해하면 이해할 수록 우리는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비온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했던 것이 아닐까.

    본론

    (1) 책 요약

    비온은 감정이나 경험은 제대로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배움이 된다고 하였다. 인간은 감각과 감정을 매일 경험하고 있지만, 그것을 사고의 과정으로 변환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서도 그렇다. 오랫동안 감정에 대해서 탐구하고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야 이성적 사고를 통해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사고하는 능력은 단지 태어나면서 바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라 나면서 계속 발달되고 발전되어간다. 비온은 이러한 감각과 감정을 의미있는 사고로 전환시키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알파 기능’이라고 불렀다. 이는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어머니는 아이가 감정을 표현하면, 아이가 감정에 대해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받아들이고, 해석해주고, 이해시켜 주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을 계속적으로 하다 보면, 그것을 온전히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고를 배워가는 시작이 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항상 쉽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이나 감각이 너무 강하여 사고로 바뀌지 못하고 그대로 있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을 바로 ‘베타 요소’라고 한다. 알파 기능을 통해 사고가 잘 작동을 할 수가 없으면, 베타 요소는 신체 증상, 불안 등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어진다. 이렇듯, 우리는 감정과 감각을 느끼면서도 많은 정보를 처리하지 못할 때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것으로부터 항상 모르는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확실한 결론이 없다. 이 과정을 잘 견뎌내어 사고를 자유롭게 사고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 표현할 수 있다. 이 과정이 바로 배움이다. 배움은 모르는 상태에 계속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힘으로 견뎌내어 하나씩 나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경험이다. 진짜 배움은 내가 모르고 있음을 알고, 모른채 견디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2) 교육학적 시사점

    – 배움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소화 과정’이다

    교사는 지식 전달자이기 전에, 학생의 감정과 경험을 소화 가능하게 만드는 조력자이자 촉진자여야 한다. 파커 J. 파머가 『가르칠 수 있는 용기』라는 책에서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교사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진정성 있는 태도를 가져야 좋은 가르침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교사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교사는 지식의 전달을 1순위로 꼽고 있으며, 객관주의적인 사고가 지식의 구조에서 가장 정점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파머는 선생님으로서 먼저 해야할 일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교사 자신을 먼저 이해하고 소화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함을 말한다. 그 소화의 과정이 있어야 학생들 또한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될 수 있다. 또한 학생들이 그들의 감정을 제대로 해석하고 소화할 수 있게 해주며 그때부터 학습이 시작되게 해 줄 수 있다. 교사는 정보 전달이라는 가르침의 목적에서 벗어나 자신을 이해하고 알며, 우선적으로 학생들에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을 통해 학생들이 감정을 소화하고 배움을 가능하게 하도록 할 수 있다.

    –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교육

    비온은 사고의 내용보다는 사고의 능력을 중시하였다. 즉 무엇을 사고하느냐보다는 어떻게 사고하느냐, 왜 그런 것이냐 등의 과정을 더 중시한 것이다. 사고의 내용은 즉,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정적이고 결과중심의 사고를 해 나가고, 정확한 답을 추구해 간다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사고하는지, 왜라고 질문하는 것은 배움의 방법적 측면을 더욱더 고려한다.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은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항상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이런 명확하지 못한 상황을 견디고 창의적인 사고를 해야만 한다. 그렇게 방법을 찾아나간다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걸어가기에 항상 잘 모르고, 어떤 것을 해야할지 망설이며, 이해할 시간이 부족하다. 즉 방법을 찾아나갈 때 그 답은 변화할 수 있고, 언제나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실천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는 모르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탐구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여유를 확보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즉 그러한 시간은 나에게 순간 순간 정확한 답을 주지는 못하지만 사고의 과정 행하는 사고의 힘을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이 삶에 적용된다. 이는 자기주도학습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가능하다.

    – 교사-학생 관계의 ‘알파 기능’화

    교사-학생 관계는 ‘알파 기능’을 실천하는 관계여야만 한다. 즉,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교사가 학생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의미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다시 학생들에게 그 감정에 직면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을 계속적으로 반복해 나갈 때 학생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사고로 전환할 힘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감정이 사고보다 먼저 목소리를 내는 경우를 경험해 본적이 있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면, 나는 감정(슬픔, 불안, 분노 등)을 느끼게 되면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부터 흐른다. 감정이 왜 나타나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표현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다. 그때 나는 감정을 사고로 언어로 전환할 힘이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나는 그때의 감정을 다시 생각하고, 생각을 정리하며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감정이 사고로 전환되지 않으면 일단 내가 어떤 상태인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며,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그래서 나의 경험에 의하면 ‘알파 기능’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동안 그 감정에 대해서 분석과 비판, 직면 등을 해 나가야지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는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교사일 것이며, 교사는 가르치는 선생님이기 이전에 학생들을 보살피는 보호자의 역할을 하면서 그들이 진정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 알파기는은 학교에서의 상담교육이나 감정코칭과 같은 작업과 큰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 배움의 장애는 단순한 능력 부족이 아니라, 감정의 과잉일 수 있다.

    어떤 학생은 ‘못 배워서’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과잉이 되어 사고가 멈춘 상태일 수 있다. 나의 경험을 예로 들자면, 내가 아팠을 때의 경험이다. 나에겐 내가 아픈 일이 너무 큰일 이었는데 그때 너무 많은 감정들을 한꺼번에 느껴졌다. 내가 그때까지 느껴본 감정의 종류들보다 더 많이 느끼고 소화를 못시켰던 경험이 있다. 너무 많고 복잡한 감정을 해석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도 하고, 해석이 잘되었는지 못되었는지 또 자기 검열을 해 봐야 하고, 정확한 감정의 길을 찾으려고 하니 애매모호한 감정의 길을 한번에 건널 수 없고 그 상황을 견뎌내야 해서 너무 어려웠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말을 잃어 버렸다. 말을 하려고 해도 꼬이기만 하고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없고 항상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지식의 구조 앞에 나는 홀연히 무릎 꿇을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배움을 해 나가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지적 장애가 생긴다면 그것은 그들의 능력부족이 아니라 정말 우리를 구성하는 것 중에 감정이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여 소화하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인지 과정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감정이 과잉이 되면 인지 기능이 마비가 되는 경우기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교사가 단순한 설명을 하거나 보충수업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학생이 정서적으로 안전하게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해석하고 지지를 해 주는 것을 필요로 한다.

    결론

    비온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학생의 감정의 과잉에 대한 이해와 그로 인한 사고의 정지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 배움의 힘을 어떻게 길러주는가?” 우리 나라의 교육은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가? 물어보고 싶은 대목이다. 이러한 의구심을 품고 쓴 책이 비온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기>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학생들의 감정과 혼란을 감당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알파 기능을 활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베타 요소는 학생들의 신체를 통해 그 작용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정서적, 관계적 지지를 해 주는 것이 곧 배움의 일환이며, 학생들이 진짜 자기를 만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교육에서 치유가 이루어 지려면, 우리는 정서와 사고가 연결되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그 연결이 가능해지기까지는 ‘모른다는 고통’을 함께 견뎌내야 한다. 비온의 교육은 그저 ‘생산성 있는 학습’이 중요한 것을 넘어 깊이 있는 인간을 성장시키는 교육으로 우리가 나아가도록 한다는데 그 의의를 가진다.

    참고문헌

    알프레드 비온(2012). 경험에서 배우기(윤순임 외 옮김). NUN.(원제 1962).

    파커 J. 파머(2024). 가르칠 수 있는 용기(김성한 옮김). 한문화. (원제 1998).

    [영어 요약]

    Bion asks us this question: “How does understanding a student’s emotional excess and the resulting suspension of thinking help us cultivate the power of learning?” In our country’s education system, emotions are not regarded as important—then how can students be given a genuine opportunity to truly learn? This is the question that arises. It is with this doubt in mind that Bion wrote the book Learning from Experience. In this book, we learn that it is essential to use the alpha function to help students endure their emotions and confusion and to enable rational thinking. Without this, the beta elements manifest themselves through the student’s body. Therefore, providing emotional and relational support to help students understand and express their feelings is part of learning itself and a way for them to encounter their true self. For healing to take place in education, we must help connect emotion and thought, and this connection requires us to endure together the pain of not knowing. Bion’s vision of education goes beyond mere “productive learning” and holds significance in guiding us toward an education that fosters the growth of a deeply developed human being.

    [일본어 요약]

    ビオンは私たちにこう問いかけています。”学生の感情の過剰さと、それによって思考が停止することを理解することは、私たちの学びの力をどのように育てるのか?” 韓国の教育では感情を重要視していませんが、そのような中で、学生に本当に学ぶ機会をどのように与えているのでしょうか?この疑問を抱きながら書かれた本が、ビオンの『経験から学ぶ』です。この本では、学生の感情や混乱を受け止め、理性的な思考ができるようにするためには、アルファ機能を活用することが不可欠であることがわかります。そうでなければ、ベータ要素は学生の身体を通してその作用を現します。したがって、学生が自分の感情を理解し、表現できるように、情緒的・関係的な支援を提供することは、学びの一環であり、学生が本当の自分に出会う方法なのです。このように、教育において癒しが実現するためには、私たちは感情と思考がつながるように支援しなければならず、そのつながりが可能になるまで「わからないという苦しみ」を共に耐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ビオンの教育は、単なる「生産性のある学習」を超えて、深みのある人間を育てる教育へと私たちを導くという点に意義を持ってい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