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말
교실에서 이런 장면은 낯설지 않다.
“여기까지 이해됐나요?”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시험이 끝난 뒤, 혹은 과제를 제출한 뒤 우리는 안다.
그 끄덕임이 이해의 신호가 아니었다는 것을.
왜 학생들은 모른다고 말하지 못할까?
이 질문은 학습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교실에 작동하는 ‘무의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억압’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이나 생각을 의식 밖으로 밀어내는 과정이다.
교실에서 “모른다”는 말은 단순한 정보 부족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 이렇게 해석된다.
-
나는 뒤처졌다
-
나는 부족하다
-
나는 기대에 못 미친다
학생은 이 불편한 감정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한다.
“집에 가서 다시 보면 이해될 거야.”
“다른 애들도 다 알겠지 뭐.”
이것은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상황을 설명해 버린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
교실은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 안에는 미묘한 분위기와 권위가 흐른다.
교사는 질문을 던지고, 학생은 응답한다.
이 관계 안에서 학생은 종종 ‘좋은 학생’의 역할을 수행한다.
여기서 동일시가 작동한다.
학생은 교사가 기대하는 모습에 자신을 맞춘다.
모른다고 말하는 대신,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관계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방법이 된다.
그 끄덕임은 지식의 신호가 아니라
관계의 신호일 수 있다.
전이: 교사는 누구로 경험되는가
정신분석에서 전이는
현재의 인물을 과거의 중요한 인물처럼 경험하는 현상이다.
학생은 교사를 단순한 ‘설명자’로만 경험하지 않는다.
평가자, 부모, 권위자, 혹은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대상처럼 경험하기도 한다.
이때 “모른다”는 말은
지적 질문이 아니라 관계적 위험이 된다.
혹시 실망하지 않을까?
혹시 나를 능력 없는 학생으로 보지 않을까?
그래서 학생은 침묵을 선택한다.
교실의 무의식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교실에는 보이지 않는 규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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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이해하는 것이 능력이다
-
질문이 많으면 수업이 느려진다
-
모르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다
이런 메시지가 반복될수록
학생은 자신의 무지를 억압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해는 종종 “모르겠다”는 말에서 시작된다.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교실
만약 교실이
지식의 전달 공간이 아니라
사고의 형성 공간이라면,
우리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해했나요?” 대신
“어디에서 막혔나요?”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대신
“지금 혼란스러운 지점은 무엇인가요?”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지적 성장이 가능한 공간이다.
억압이 줄어들수록
사고는 깊어진다.
마무리하는 말
교실은 단순한 학습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는 욕망, 불안, 동일시, 전이가 흐른다.
학생이 고개를 끄덕일 때
우리는 지식이 전달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때로 그 끄덕임은
관계를 지키기 위한 무의식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교육은
‘아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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