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정신분석과 교육

  • 교육은 왜 어떤 사람에게는 치유가 되는가 — 정신분석의 개념 ‘승화(sublimation)’로 바라본 배움의 의미

    1. 배움은 단순한 지식 전달일까

    우리는 보통 교육을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학교는 지식을 배우는 곳이고, 공부는 시험을 위해 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공부는 종종 의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과를 위해 견뎌야 하는 과정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배움은 전혀 다른 경험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공부를 통해 오히려 자신을 회복한다. 혼란스러웠던 생각이 조금씩 정리되고, 마음속에 있던 불안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삶의 방향이 다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은 단순한 지식 습득과는 다르다. 배움이 삶의 의미와 연결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2. 정신분석이 말하는 ‘승화’

    정신분석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 있다. 바로 승화(sublimation) 이다.

    승화란 인간의 욕망과 감정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불안도 있고 좌절도 있으며, 때로는 분노와 슬픔도 경험한다.

    이러한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대로 표현될 때는 때로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러한 에너지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본다.

    예술, 창작, 학문과 같은 활동이 그 예이다. 지적 탐구 역시 이러한 승화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3. 공부를 통해 마음이 정리되는 경험

    많은 사람들은 공부를 하면서 독특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생각이 어떤 개념을 이해하는 순간 갑자기 정리되는 경험이다.

    그 순간 머릿속이 환해진다. 이해의 순간은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다. 마음속의 혼란이 구조를 가지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오히려 공부에 몰두하기도 한다.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며, 개념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이 과정 속에서 감정이 조금씩 안정된다. 생각은 언어가 되고, 질문은 탐구가 되며, 불안은 이해를 향한 움직임으로 바뀐다. 그래서 공부는 때로 자신을 회복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4. 이해의 순간이 주는 지적 기쁨

    배움에는 특별한 기쁨이 존재한다. 어떤 문제를 오래 고민하다가 갑자기 이해가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 우리는 단순히 정답을 찾은 것이 아니다. 세계의 일부를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흔히 지적 기쁨(intellectual joy) 이라고 불린다.

    새로운 개념을 이해할 때 놀라움이 생기고, 서로 다른 생각이 연결될 때 깊은 만족감이 생긴다. 이 기쁨은 생각보다 강한 정서적 경험이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이해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5. 교육이 치유가 될 수 있는 이유

    물론 모든 교육이 이러한 경험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경쟁과 평가만 강조되는 환경에서는 배움의 기쁨이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배움은 인간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다. 공부를 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생각을 만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알게 된다.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교육은 능력 개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정리되고 새로운 의미가 발견되며, 삶을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쩌면 교육의 깊은 의미는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배움은 인간을 단지 더 많이 아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가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집단은 왜 점점 비슷해지는가 — 교실 속 동조 심리

    1. 토론은 왜 비슷해질까

    토론을 하면 다양한 생각이 나올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실제 교실에서는 의견이 점점 한 방향으로 모인다.

    몇 사람이 먼저 말하면
    그 뒤의 발언은 그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람은 혼자 생각하는 존재이기 전에
    집단 속에서 안전을 찾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2. 분위기는 생각을 만든다

    교실에는 항상 ‘분위기’가 있다.
    누가 옳고 그른지 말하지 않아도
    어떤 의견이 환영받는지는 느껴진다.

    사람은 공기를 읽는다.
    그리고 그 공기에 맞춰 말을 조정한다.

    이것이 집단 무의식의 힘이다.


    3. 우리는 왜 비슷해지려 할까

    다른 의견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눈에 띄게 된다.

    눈에 띄는 것은 곧
    평가의 대상이 되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틀릴 수도 있는 말’ 대신
    ‘안전한 말’을 선택한다.

    집단과 비슷해지는 것은
    안전해지는 방법이기도 하다.


    4. 집단은 불안을 싫어한다

    토론 주제가 복잡할수록
    사람들은 더 빨리 하나의 입장으로 모인다.

    의견이 갈리면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합의는 안정감을 준다.
    그래서 집단은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결론을 향해 수렴한다.

    이것이 집단의 방어기제다.


    5. 교실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요즘 사회도 비슷하다.

    많은 사람이 동의한 의견이
    곧 ‘상식’이 된다.

    SNS에서는
    같은 생각이 빠르게 증폭된다.

    다른 목소리는
    쉽게 피로감을 주는 존재가 된다.

    교실의 동조는
    이미 사회의 모습을 닮아 있다.


    6. 다른 생각은 왜 불편할까

    다른 의견은
    집단의 균형을 흔든다.

    그래서 불편하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새로운 사고가 시작된다.

    완벽한 합의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허용하는 용기다.


    7. 교육은 무엇을 할 것인가

    교육은
    학생들을 비슷하게 만드는 곳이어야 할까.

    아니면
    다름을 견디는 힘을 기르는 곳이어야 할까.

    집단이 비슷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다른 생각이 말해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그것이 교육의 역할일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힘도
    바로 그 지점에 있다.

  • 학생은 왜 모른다고 말하지 못할까? — 억압과 교실의 무의식

    시작하는 말

    교실에서 이런 장면은 낯설지 않다.

    “여기까지 이해됐나요?”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시험이 끝난 뒤, 혹은 과제를 제출한 뒤 우리는 안다.
    그 끄덕임이 이해의 신호가 아니었다는 것을.

    왜 학생들은 모른다고 말하지 못할까?

    이 질문은 학습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교실에 작동하는 ‘무의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억압’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이나 생각을 의식 밖으로 밀어내는 과정이다.

    교실에서 “모른다”는 말은 단순한 정보 부족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 이렇게 해석된다.

    • 나는 뒤처졌다

    • 나는 부족하다

    • 나는 기대에 못 미친다

    학생은 이 불편한 감정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한다.

    “집에 가서 다시 보면 이해될 거야.”
    “다른 애들도 다 알겠지 뭐.”

    이것은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상황을 설명해 버린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

    교실은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 안에는 미묘한 분위기와 권위가 흐른다.

    교사는 질문을 던지고, 학생은 응답한다.
    이 관계 안에서 학생은 종종 ‘좋은 학생’의 역할을 수행한다.

    여기서 동일시가 작동한다.
    학생은 교사가 기대하는 모습에 자신을 맞춘다.
    모른다고 말하는 대신,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관계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방법이 된다.

    그 끄덕임은 지식의 신호가 아니라
    관계의 신호일 수 있다.


    전이: 교사는 누구로 경험되는가

    정신분석에서 전이는
    현재의 인물을 과거의 중요한 인물처럼 경험하는 현상이다.

    학생은 교사를 단순한 ‘설명자’로만 경험하지 않는다.
    평가자, 부모, 권위자, 혹은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대상처럼 경험하기도 한다.

    이때 “모른다”는 말은
    지적 질문이 아니라 관계적 위험이 된다.

    혹시 실망하지 않을까?
    혹시 나를 능력 없는 학생으로 보지 않을까?

    그래서 학생은 침묵을 선택한다.


    교실의 무의식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교실에는 보이지 않는 규칙이 있다.

    • 빨리 이해하는 것이 능력이다

    • 질문이 많으면 수업이 느려진다

    • 모르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다

    이런 메시지가 반복될수록
    학생은 자신의 무지를 억압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해는 종종 “모르겠다”는 말에서 시작된다.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교실

    만약 교실이
    지식의 전달 공간이 아니라
    사고의 형성 공간이라면,

    우리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해했나요?” 대신
    “어디에서 막혔나요?”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대신
    “지금 혼란스러운 지점은 무엇인가요?”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지적 성장이 가능한 공간이다.

    억압이 줄어들수록
    사고는 깊어진다.


    마무리하는 말

    교실은 단순한 학습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는 욕망, 불안, 동일시, 전이가 흐른다.

    학생이 고개를 끄덕일 때
    우리는 지식이 전달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때로 그 끄덕임은
    관계를 지키기 위한 무의식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교육은
    ‘아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 칭찬은 왜 중독이 되는가 ― 인정 욕구의 구조와 교육의 딜레마

    우리는 왜 칭찬에 그렇게 약한가

    칭찬은 달콤하다.
    누군가 “잘했다”고 말해주는 순간, 우리는 존재가 승인받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다. 존재의 안정감이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타자의 시선 속에서 자아를 형성한다. 특히 유아기는 양육자의 눈빛과 반응을 통해 “나는 괜찮은 존재인가?”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시기다. 이때의 인정 경험은 자아의 토대를 형성한다.

    문제는, 그 구조가 성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는 여전히 타자의 인정 속에서 나를 확인하려 한다.
    칭찬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나는 가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답처럼 기능한다.


    칭찬은 왜 점점 더 필요해지는가

    처음의 칭찬은 격려다.
    그러나 반복될수록 그것은 조건이 된다.

    “잘했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성과를 냈기 때문에 인정받는다.”

    이 구조가 굳어지면, 자아는 스스로를 평가하지 못하고 외부의 기준에 의존하게 된다. 인정은 보상이 아니라 생존 조건이 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칭찬이 없으면 불안해진다.
    피드백이 없으면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른다.
    박수가 멈추면 존재 가치가 흔들린다.

    이것이 바로 인정 욕구의 중독 구조다.

    중독은 과잉 자극이 아니라, 결핍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칭찬이 없으면 내가 무가치해질 것 같은 공포. 이 공포가 반복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칭찬을 원한다.


    교육은 왜 칭찬을 동기부여로 사용하는가

    현대 교육은 부정적 통제 대신 긍정적 강화 전략을 선호한다. 벌보다 칭찬이 효과적이라는 믿음은 교육학의 상식처럼 받아들여진다.

    실제로 칭찬은 단기적으로 매우 강력한 동기 자극이다. 아이는 인정받은 행동을 반복한다. 성취는 늘어나고 교실은 안정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칭찬이 반복될수록, 아이는 행동의 기준을 자기 내부가 아니라 교사의 반응에서 찾게 된다. “내가 옳은가?”라는 질문 대신 “선생님이 좋아하실까?”를 묻게 된다.

    이때 형성되는 자아는 외부 반응에 민감한 자아다.
    겉으로는 성취 지향적이지만, 내면은 인정에 의존한다.

    교육은 자율성을 기른다고 말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의존적 구조를 강화할 위험이 있다.


    칭찬이 멈추는 순간 벌어지는 일

    문제는 칭찬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급 학교로 올라가거나, 경쟁 환경에 놓이거나, 성과가 떨어지는 순간, 외부의 박수는 줄어든다. 이때 내부 기준이 형성되지 않은 자아는 급격히 흔들린다.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되지?”
    “이제 나는 가치가 없는 건가?”

    이 불안은 성취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정 단절에서 오는 것이다.

    칭찬에 익숙해진 자아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힘이 약하다. 외부의 목소리가 사라지면, 내부에는 비판의 목소리만 남는다. 과도한 자기비난과 불안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칭찬을 멈춰야 하는가

    문제는 칭찬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칭찬이 자아의 근거가 될 때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은 “칭찬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칭찬이 자아를 대신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예컨대 결과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과정에 대한 관찰.
    평가의 언어가 아니라, 존재의 언어.

    “잘했다” 대신
    “네가 얼마나 고민했는지 보인다.”
    “네 생각이 흥미롭다.”

    이런 언어는 외부 보상이 아니라 내부 감각을 자극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아이가 스스로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형성하는 일이다. 타자의 인정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유일한 기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정 욕구를 넘어서는 교육

    인정 욕구는 인간의 본질적 구조다.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그러나 교육은 그것을 증폭시킬 수도, 성숙시킬 수도 있다.

    칭찬을 동기부여의 도구로만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자율적 자아 형성을 위한 디딤돌로 삼을 것인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육은, 박수 속에서만 존재하는 자아가 아니라, 침묵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자아를 길러내는 일이다.

    칭찬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산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산소가 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 없이는 숨 쉴 수 없게 된다.

    교육은 아이를 박수의 세계에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박수가 사라져도 걸어갈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 지점에서 비로소, 칭찬은 중독이 아니라 성장의 자원이 된다.

  • 불안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 ― 성취 이후에도 남아 있는 결핍에 대하여

    시작하며

    우리는 이렇게 배워왔다.
    좋은 대학에 가면 안정된다.
    좋은 직업을 가지면 괜찮아진다.
    경제적으로 자립하면 불안은 줄어든다.

    그래서 우리는 쉼 없이 달렸다.
    성적을 올리고, 스펙을 쌓고, 자격증을 따고, 더 나은 조건을 향해 이동했다.

    그러나 이상하다.
    목표에 도달했는데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미묘하고 깊은 형태로 남는다.

    왜일까?


    성취는 결핍을 없애지 않는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결핍의 존재’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말했듯, 우리는 충동과 욕망, 그리고 그것을 억제하는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이후 자크 라캉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욕망은 결코 완전히 충족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욕망은 어떤 대상을 얻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으로 이동한다.
    결핍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꾼다.

    따라서 ‘성취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믿음은
    구조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성취는 결핍을 덮을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한다.


    교육은 무엇을 약속해 왔는가

    현대 교육은 오랫동안 이렇게 말해왔다.

    “지금의 불안을 견디면, 미래는 안정될 것이다.”

    입시, 평가, 경쟁은 모두
    ‘나중의 안정’을 담보로 작동한다.

    교실은 미래를 위한 준비 공간이 된다.
    현재의 감정은 유예된다.
    불안은 관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 구조 안에는 중요한 전제가 숨어 있다.

    “너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이 메시지는 노골적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반복된다.
    더 잘해야 하고, 더 앞서야 하며, 더 증명해야 한다.

    이때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동력으로 전환된다.


    불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직된다

    불안은 단순히 제거해야 할 감정이 아니다.
    정신분석은 불안을 ‘위험의 신호’로 본다.

    불안은 우리에게 말한다.

    • 지금의 나와 타인의 기대 사이에 간극이 있다.

    • 내가 붙잡고 있는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 사랑과 인정이 조건화되어 있다.

    교육은 종종 이 불안을 성취로 관리하려 한다.
    성적, 결과, 비교를 통해 구조화한다.

    그러나 그 순간
    불안은 사라지지 않고,
    자아의 일부로 편입된다.

    “나는 잘해야 안전하다.”
    “나는 실패하면 가치가 없다.”

    이 믿음이 내면화될 때,
    성취 이후에도 불안은 계속된다.


    좋은 대학, 좋은 직업, 안정된 삶

    그 이후의 공허

    많은 이들이 목표를 이룬 뒤
    예상치 못한 감정을 경험한다.

    허무, 공허, 방향 상실.

    왜냐하면 그동안의 삶이
    ‘타인의 기대를 향한 운동’이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라캉의 말처럼,
    우리는 종종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부모, 교사, 사회가 원하는 길을 따라가며
    자신의 욕망은 뒤로 미룬다.

    목표를 달성한 순간,
    그 운동이 멈추면
    비로소 질문이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 질문 앞에서
    불안은 다시 고개를 든다.


    교육은 불안을 해결하는가, 강화하는가

    이 질문은 불편하다.

    교육은 분명 사회적 이동의 통로가 되어 왔다.
    많은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동시에 불안을 구조화하는 장치가 되기도 했다.

    • 비교 중심 평가

    • 조건적 인정

    • 성취와 가치의 동일시

    이 체계 안에서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더 정교하게 관리될 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교육은 가능한가

    불안을 제거하는 교육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안은 인간 조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안을 ‘성과로만 다루지 않는 교육’은 가능하다.

    • 감정을 말할 수 있는 교실

    • 실패가 정체성을 위협하지 않는 구조

    • 성취와 존재 가치를 분리하는 메시지

    • 비교가 아닌 탐색을 허용하는 환경

    이때 불안은
    위협이 아니라 탐색의 신호가 된다.

    불안은
    “더 가져야 한다”는 압박이 아니라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한다.


    사라지지 않는 불안과 함께 사는 법

    불안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다루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성취는 삶의 일부일 수 있다.
    그러나 존재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은
    불안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견딜 수 있는 자아를 기르는 것이다.

    자기 욕망을 탐색할 수 있는 힘.
    타인의 시선과 거리를 둘 수 있는 힘.
    실패해도 무너지지 않는 자존감.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시대에
    교육은 무엇을 약속할 것인가.

    안정인가,
    아니면 자기 탐색의 용기인가.

    이 질문은
    지금 우리의 교실 안에 놓여 있다.

  • 교실에서 반복되는 무의식은 무엇일까?

    늘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교실은 해마다 새로운 학생을 맞이한다.
    구성원은 달라지지만, 분위기는 어딘가 익숙하다.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이 있고, 지나치게 조용한 학생이 있다.
    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이유 없이 교사에게 날을 세우는 아이도 있다.

    교사 역시 매년 비슷한 감정을 경험한다.
    어떤 학생에게는 유난히 예민해지고, 어떤 학생에게는 과하게 마음이 쓰인다.

    사람은 바뀌는데 장면은 반복된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교실은 감정이 먼저 움직이는 공간이다

    우리는 교실을 지식 전달의 장소로 이해한다.
    하지만 실제로 교실을 움직이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감정이다.

    학생은 교실에 들어올 때, 교과서만 들고 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과거 경험을 함께 들고 온다.

    인정받지 못했던 기억,
    지적받을 때마다 위축되었던 순간,
    권위자에게 반항하고 싶었던 감정.

    이 모든 것이 현재의 교사와 만나면서 다시 작동한다.
    이것이 교실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이다.


    학생은 교사에게 과거를 옮긴다

    어떤 학생은 사소한 지적에도 크게 위축된다.
    또 어떤 학생은 이유 없이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이 반응은 단순한 태도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학생은 현재의 교사를 대하고 있지만, 동시에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과거의 부모,
    과거의 교사,
    자신을 평가하던 권위자.

    이처럼 과거의 감정이 현재 인물에게 옮겨오는 현상을 전이라고 한다.
    교실은 그래서 과거 관계가 다시 연출되는 무대가 된다.


    교사 역시 자유롭지 않다

    무의식은 학생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사도 자신의 과거를 가지고 교실에 선다.

    유독 신경이 쓰이는 학생이 있다.
    설명하기 어려운 거부감이 드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과하게 보호하고 싶은 학생도 있다.

    그 감정은 현재 상황만으로 설명되지 않을 수 있다.
    학생이 교사의 어린 시절 모습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고,
    과거의 상처를 건드릴 수도 있다.

    이때 교사는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
    이를 역전이라고 부른다.

    교실은 학생과 교사의 무의식이 동시에 작동하는 공간이다.


    집단은 역할을 만들어 낸다

    교실에는 늘 비슷한 유형이 등장한다.
    ‘문제아’, ‘모범생’, ‘분위기 메이커’.

    흥미로운 점은 이 역할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집단은 긴장을 분산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특정 역할을 맡긴다.

    한 학생이 계속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개인의 성향만이 아니라 집단 전체의 불안을 떠안은 결과일 수 있다.

    교실은 하나의 심리적 구조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구조는 쉽게 반복된다.


    교육은 반복을 인식하는 일이다

    이 모든 장면을 단순히 ‘지도력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교실에서 반복되는 갈등은 종종 무의식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교사의 역할은 모든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반복을 알아차리고, 그대로 재연하지 않는 것이다.

    화가 나는 순간 잠시 멈추는 것.
    특정 학생을 쉽게 규정하지 않는 것.
    “왜 이 장면이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질까?”를 묻는 것.

    그 작은 성찰이 반복의 흐름을 바꾼다.


    교실은 관계의 공간이다

    교실은 배움의 공간이기 전에 관계의 공간이다.
    그리고 관계는 언제나 과거와 현재가 겹쳐진 자리에서 만들어진다.

    무의식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같은 장면을 조금 다르게 만들 수 있다.

    어쩌면 교육이란 새로운 지식을 더하는 일이 아니라,
    오래된 반복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 “좋은 교사”가 되고 싶을수록 힘든 이유― 초자아와 교사의 이상화

    들어가는 말

    “나는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

    아마 교직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아니 수없이 되뇌었을 문장일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왜 때때로 우리를 성장시키는 대신,
    지치게 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만들까?


    우리가 마음속에 그려놓은 ‘좋은 교사’

    좋은 교사는 어떤 사람인가?

    아이를 끝까지 기다려주는 사람.
    늘 따뜻한 말로 반응하는 사람.
    감정을 잘 조절하는 사람.
    수업 준비를 철저히 하는 사람.
    아이 한 명 한 명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

    이상적인 교사상은 대개 흠이 없다.
    거기에는 피곤함도, 짜증도, 한계도 없다.

    문제는 그 이상적인 이미지가
    어느 순간 ‘기준’이 되고,
    더 나아가 ‘명령’이 된다는 점이다.


    초자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초자아(superego)는
    내 안의 도덕적 기준이자, 금지와 명령의 목소리다.

    “그렇게 하면 안 돼.”
    “넌 더 잘해야 해.”
    “왜 그것밖에 못 했니?”

    초자아는 사회적 규범, 부모의 기대, 교사상, 전문직 윤리 등을 내면화한 결과다.
    교사에게는 이 초자아가 특히 강하게 형성되기 쉽다.

    왜냐하면 교사는
    ‘모범’이 되어야 하고,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며,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사는 실수했을 때
    단순히 “오늘 좀 힘들었네”라고 넘기지 못한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왜 그 순간 아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더 성숙하게 반응하지 못했을까.”

    이때 초자아는 조용히 속삭인다.

    “좋은 교사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이상화가 만들어내는 과도한 자기 비판

    이상화(idealization)는 어떤 대상을 완벽하게 그려내는 심리적 과정이다.
    우리는 종종 ‘좋은 교사’를 이상화한다.

    문제는 그 이상이 너무 높을 때다.

    이상은 방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상이 ‘절대적 기준’이 되면,
    현재의 나는 언제나 부족한 존재가 된다.

    수업이 조금만 흔들려도
    아이와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겨도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이 있어도

    “나는 아직 멀었다.”
    “나는 좋은 교사가 아니다.”

    이런 생각이 반복된다.

    자기 성찰은 성장의 출발점이지만,
    과도한 자기 비판은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번아웃과 죄책감의 연결

    흥미로운 것은,
    교사들이 지칠수록 오히려 죄책감이 커진다는 점이다.

    “아이들 앞에서 이렇게 힘들어하면 안 되는데.”
    “나는 이 일을 선택했는데 왜 이렇게 버겁지?”
    “아이들은 잘못이 없는데…”

    이 죄책감 역시 초자아의 목소리다.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
    항상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기대,
    전문가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기준.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을 밀어붙이다 보면
    어느 순간 정서적 에너지가 고갈된다.

    번아웃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지나치게 이상화된 자기 기준과
    현실의 나 사이의 간극이 커질 때 생기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상을 버려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문제는 이상이 아니라
    그 이상을 대하는 방식이다.

    정신분석학자 위니컷은 “충분히 좋은 어머니(good enough mother)”라는 표현을 썼다.
    완벽한 어머니가 아니라, 충분히 좋은 어머니.

    교사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완벽한 교사가 아니라,
    충분히 좋은 교사.

    실수할 수 있고,
    감정이 흔들릴 수 있고,
    모든 아이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교사.

    초자아의 목소리가 들릴 때
    그것을 완전히 따르거나, 완전히 억누르기보다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이 기준은 나를 성장시키는가,
    아니면 나를 압박하고 있는가?”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의 이면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아이를 향한 진심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이
    자기 처벌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가끔 멈춰 서야 한다.

    나는 오늘 완벽했는가?
    보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나 자신에게도 충분히 인간적이었는가?

    좋은 교사를 향한 길은
    아이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혹시 오늘도
    “나는 왜 이 정도밖에 못 했을까”라고 생각했다면,
    그 문장 뒤에 조용히 덧붙여보자.

    “그래도 나는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그 문장이
    초자아의 목소리를 조금은 부드럽게 만들지 모른다.

  • 학생은 교사를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 지식 말고, 태도

    들어가며

    수업이 끝난 뒤에도 학생에게 오래 남는 것은
    대개 설명한 개념이나 공식이 아니다.
    오히려 잘 기억되지 않는 것들—
    교사가 말을 멈추던 순간, 질문을 받아들이던 표정,
    당황했을 때의 숨 고르기 같은 것들이다.

    학생은 교사를 통해
    지식을 배우기보다 사람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배운다.


    전이는 수업 안에서 이미 일어난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전이
    치료실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권위가 있고, 평가권을 지니고 있으며,
    말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 앞에서
    전이는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교사는 학생에게

    • 어떤 부모였고
    • 어떤 어른이었고
    • 어떤 ‘기대의 대상’이었는지를
      겹쳐서 불러온다.

    그래서 학생의 반응은 종종
    수업 내용과 정확히 비례하지 않는다.
    과도하게 잘 따르거나, 이유 없이 반항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위축되기도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전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교사가 어떤 태도로 존재하느냐이다.


    동일시는 설명이 아니라 ‘방식’을 향한다

    학생은 교사의 지식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는다.
    대신 교사가 지식을 다루는 방식을 동일시한다.

    • 모르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 실수를 했을 때 변명하는지, 인정하는지
    • 감정이 올라왔을 때 말을 멈추는지, 밀어붙이는지

    이 모든 것이
    학생에게는 하나의 모델이 된다.

    그래서 어떤 수업에서는
    학생이 “이 문제를 이렇게 풀어라”는 말보다
    “아, 저렇게 생각해도 되는구나”를 배운다.

    동일시는 내용이 아니라
    리듬과 태도를 향해 일어난다.


    교사의 말투와 리듬은 교육의 숨결이다

    같은 말을 해도
    누군가의 수업은 숨이 막히고,
    누군가의 수업은 숨이 트인다.

    그 차이는 말의 난이도가 아니라
    말투와 리듬에 있다.

    • 급하게 몰아붙이는 말
    • 여백 없이 채워 넣는 설명
    • 질문이 나오기 전에 닫혀버리는 결론

    이런 리듬 속에서 학생은
    ‘생각해도 되는 시간’을 잃는다.

    반대로
    말 사이에 여백이 있고,
    감정이 올라오면 잠시 멈출 줄 아는 교사 앞에서
    학생은 사고를 안전하게 확장한다.

    교육은 말의 양이 아니라
    말이 놓이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감정을 처리하는 교사의 모습이 곧 수업이다

    교사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감정의 유무가 아니라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다.

    • 짜증을 농담으로 흘려보내는지
    • 불안을 통제로 바꾸는지
    • 무력감을 침묵으로 견디는지

    학생은 그 장면을 통해
    “어른은 감정을 이렇게 다루는구나”를 배운다.

    어쩌면 학생에게 가장 중요한 수업은
    교사가 감정을 망치지 않고 통과시키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수업은 인격의 흔적이다

    아무리 교안을 잘 짜도,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수업에는 교사의 인격이 남는다.

    정확함보다 태도가,
    완성도보다 존재 방식이
    더 오래 전해진다.

    그래서 수업은
    기술이기 이전에 관계의 사건이고,
    교육은 전달이 아니라 동행의 흔적이다.


    맺으며

    학생은 교사를 통해
    지식을 배우는 동시에
    “어떻게 살아도 되는가”를 배운다.

    그것은 교사가 의도하지 않아도 전해지고,
    통제하지 않아도 남는다.

    그래서 어쩌면
    좋은 수업이란
    완벽한 설명이 아니라,

    학생이 자기 방식으로 생각해도 괜찮다고
    느끼게 되는 시간
    일지도 모른다.

  • 교육은 왜 늘 결과만 보고 과정을 잃어버릴까

    결과로 말해지는 교육의 언어

    교육 현장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말은 성과, 결과, 성취다.
    얼마나 빨리 읽는지, 얼마나 정확히 쓰는지, 무엇을 해냈는지.
    아이의 배움은 늘 숫자와 목록으로 정리되고, 과정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배움은 원래 시간이 걸리고, 흔들리고, 돌아가기도 하는 일인데
    교육은 왜 이렇게 결과를 서둘러 요구하게 되었을까.


    결과 중심 교육이 만들어낸 효율성의 함정

    결과 중심 교육은 효율적이다.
    평가하기 쉽고, 비교하기 쉽고, 설명하기 쉽다.
    그래서 제도는 자연스럽게 결과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이 효율성은 아이의 내적 경험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아이는 무엇을 느꼈는지, 어디에서 막혔는지, 왜 멈췄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해냈는가’ 혹은 ‘못 해냈는가’만 남는다.


    정신분석이 바라보는 배움의 관점

    정신분석은 늘 결과보다 과정을 본다.
    무엇을 선택했는지보다, 왜 그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어디에서 욕망이 생기고 어디에서 멈추었는지를 묻는다.

    아이의 배움도 마찬가지다.
    배움의 과정은 단순한 연습의 시간이 아니다.
    그 안에는 좌절, 불안, 기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함께 얽혀 있다.


    과정이 지워질 때 아이에게 남는 것

    과정을 지워버린 교육은 이 감정들을 다루지 못한 채 결과만 요구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는 실패를 배움의 일부로 경험하지 못한다.
    실패는 곧 ‘능력 없음’이 되고, 과정은 기억에서 사라진다.

    결과만 남은 자리에서 아이는 점점 시도하지 않게 된다.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평가받는 대상으로 자신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과정이 사라진 교육이 만드는 정체성

    교육이 과정을 잃어버릴수록 아이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나는 어떻게 배우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나는 잘하는 사람인가 아닌가’로 자신을 정의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학습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의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문제다.


    어른이 되어서도 반복되는 결과 중심 사고

    사실 많은 어른들도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
    학교를 떠난 뒤에도 우리는 결과로 자신을 평가한다.
    얼마나 성취했는지, 얼마나 앞서 있는지, 무엇을 증명했는지.

    과정에서 겪은 감정들은 말해지지 않고
    혼자 견뎌야 할 몫으로 남는다.


    과정을 다시 교육의 중심에 놓는다는 것

    그래서 교육에서 과정을 다시 이야기하는 일은 중요하다.
    과정을 존중한다는 것은 느린 속도를 허용하는 것이고,
    흔들림을 실패로 보지 않는 것이며,
    멈춤도 배움의 일부로 인정하는 일이다.

    과정을 존중하는 교육은 아이를 보호한다.
    아이를 결과 이전의 존재로 바라보게 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충분히 배우고 있는 존재로.


    교육이 지켜야 할 마지막 자리

    교육이 결과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만 남기고 과정을 지워버리는 순간
    교육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잃는다.

    배움은 언제나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은 그 과정을 보존하는 것이다.
    아이의 속도, 아이의 흔들림, 아이의 질문이 사라지지 않도록.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남기는 교육

    어쩌면 교육의 본질은
    결과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과정이 사라지지 않게 지켜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 감정을 넘어선 사고의 기능: 진정한 배움의 의미

    서론

    나는 오랫동안 감정과 나에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 분석을 해 왔다. 화가 난다. 짜증이 난다. 기쁘다. 슬프다. 즐겁다 등의 감정만 오랫동안 써 온 나는 특별히 복잡하고 어렵다고 할만한 감정의 세계를 느껴보지 못했다. 감정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내가 20대 후반 무렵 몸이 아프고 나서부터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슬펐다. 비록 죽을만큼 아픈 병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꿈을 위해 달려왔던 시간을 모두 송두리째 바꾸어버릴 수 있었던 사건이라 나를 너무 무섭고 두렵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병으로 인한 후유증을 받아들이고, 타협했을 무렵부터 나는 나의 깊은 감정에 몰입하게 되었다. 나는 감정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였다. 감정을 잘 풀어서 말할 수도 없었고,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슬픈일이 있어도 눈물이 뚝뚝, 억울한 일이 있어도 눈물이 뚝뚝, 화가나도 눈물이 뚝뚝 모든 것이 눈물이 되어 흘러나왔다. 그 전까지는 감정을 많이 억압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누군가에게 쉽게 털어놓거나 한 적이 별로 없는 상태로 살아왔었던 것 같다. 그 억압이 이제 눈물이 되어 나타나는 구나…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왜 이렇게 감정적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아픔을 치유할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내가 경험한 이 세상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아파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나에게 눈물은 나를 치유해 주는 하나의 선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눈물 속에는 감사, 연민, 슬픔, 억울함, 불안 등이 엉켜져 있었다. 그 누구보다 이 감정들을 해석하고 싶은 사람은 나였으며, 이 불확실한 애매모호함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해석이 쉽게 되지만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이런 나의 눈물을 분석하고 해석한 결과, 내가 정말 좋은 사람임을 깨달아 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나는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지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고, 나는 대신에 정말로 공정하고 올바르게 행동하고자 하는 사람,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사람, 얼마나 타인을 위해 헌신하고 사랑을 주는 사람, 그리고 얼마나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인지 등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결론은 나의 그저 얽혀 어렴풋이 있던 감각이 생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완성되었다. 감각적인 느낌으로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던 나의 감정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때가 되었을 때 나는 나에 대해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 생각해볼 비온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기』라는 책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감정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배움을 확장한다. 감정은 이성적 사고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오랫동안 배척되어온 것이지만, 이는 분명 이해하고 알아나가야 할 인간이 가진 본능 중의 하나이며, 이를 이해하면 이해할 수록 우리는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비온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했던 것이 아닐까.

    본론

    (1) 책 요약

    비온은 감정이나 경험은 제대로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배움이 된다고 하였다. 인간은 감각과 감정을 매일 경험하고 있지만, 그것을 사고의 과정으로 변환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서도 그렇다. 오랫동안 감정에 대해서 탐구하고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야 이성적 사고를 통해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사고하는 능력은 단지 태어나면서 바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라 나면서 계속 발달되고 발전되어간다. 비온은 이러한 감각과 감정을 의미있는 사고로 전환시키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알파 기능’이라고 불렀다. 이는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어머니는 아이가 감정을 표현하면, 아이가 감정에 대해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받아들이고, 해석해주고, 이해시켜 주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을 계속적으로 하다 보면, 그것을 온전히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고를 배워가는 시작이 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항상 쉽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이나 감각이 너무 강하여 사고로 바뀌지 못하고 그대로 있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을 바로 ‘베타 요소’라고 한다. 알파 기능을 통해 사고가 잘 작동을 할 수가 없으면, 베타 요소는 신체 증상, 불안 등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어진다. 이렇듯, 우리는 감정과 감각을 느끼면서도 많은 정보를 처리하지 못할 때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것으로부터 항상 모르는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확실한 결론이 없다. 이 과정을 잘 견뎌내어 사고를 자유롭게 사고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 표현할 수 있다. 이 과정이 바로 배움이다. 배움은 모르는 상태에 계속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힘으로 견뎌내어 하나씩 나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경험이다. 진짜 배움은 내가 모르고 있음을 알고, 모른채 견디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2) 교육학적 시사점

    – 배움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소화 과정’이다

    교사는 지식 전달자이기 전에, 학생의 감정과 경험을 소화 가능하게 만드는 조력자이자 촉진자여야 한다. 파커 J. 파머가 『가르칠 수 있는 용기』라는 책에서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교사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진정성 있는 태도를 가져야 좋은 가르침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교사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교사는 지식의 전달을 1순위로 꼽고 있으며, 객관주의적인 사고가 지식의 구조에서 가장 정점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파머는 선생님으로서 먼저 해야할 일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교사 자신을 먼저 이해하고 소화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함을 말한다. 그 소화의 과정이 있어야 학생들 또한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될 수 있다. 또한 학생들이 그들의 감정을 제대로 해석하고 소화할 수 있게 해주며 그때부터 학습이 시작되게 해 줄 수 있다. 교사는 정보 전달이라는 가르침의 목적에서 벗어나 자신을 이해하고 알며, 우선적으로 학생들에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을 통해 학생들이 감정을 소화하고 배움을 가능하게 하도록 할 수 있다.

    –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교육

    비온은 사고의 내용보다는 사고의 능력을 중시하였다. 즉 무엇을 사고하느냐보다는 어떻게 사고하느냐, 왜 그런 것이냐 등의 과정을 더 중시한 것이다. 사고의 내용은 즉,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정적이고 결과중심의 사고를 해 나가고, 정확한 답을 추구해 간다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사고하는지, 왜라고 질문하는 것은 배움의 방법적 측면을 더욱더 고려한다.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은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항상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이런 명확하지 못한 상황을 견디고 창의적인 사고를 해야만 한다. 그렇게 방법을 찾아나간다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걸어가기에 항상 잘 모르고, 어떤 것을 해야할지 망설이며, 이해할 시간이 부족하다. 즉 방법을 찾아나갈 때 그 답은 변화할 수 있고, 언제나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실천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는 모르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탐구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여유를 확보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즉 그러한 시간은 나에게 순간 순간 정확한 답을 주지는 못하지만 사고의 과정 행하는 사고의 힘을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이 삶에 적용된다. 이는 자기주도학습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가능하다.

    – 교사-학생 관계의 ‘알파 기능’화

    교사-학생 관계는 ‘알파 기능’을 실천하는 관계여야만 한다. 즉,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교사가 학생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의미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다시 학생들에게 그 감정에 직면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을 계속적으로 반복해 나갈 때 학생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사고로 전환할 힘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감정이 사고보다 먼저 목소리를 내는 경우를 경험해 본적이 있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면, 나는 감정(슬픔, 불안, 분노 등)을 느끼게 되면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부터 흐른다. 감정이 왜 나타나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표현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다. 그때 나는 감정을 사고로 언어로 전환할 힘이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나는 그때의 감정을 다시 생각하고, 생각을 정리하며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감정이 사고로 전환되지 않으면 일단 내가 어떤 상태인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며,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그래서 나의 경험에 의하면 ‘알파 기능’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동안 그 감정에 대해서 분석과 비판, 직면 등을 해 나가야지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는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교사일 것이며, 교사는 가르치는 선생님이기 이전에 학생들을 보살피는 보호자의 역할을 하면서 그들이 진정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 알파기는은 학교에서의 상담교육이나 감정코칭과 같은 작업과 큰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 배움의 장애는 단순한 능력 부족이 아니라, 감정의 과잉일 수 있다.

    어떤 학생은 ‘못 배워서’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과잉이 되어 사고가 멈춘 상태일 수 있다. 나의 경험을 예로 들자면, 내가 아팠을 때의 경험이다. 나에겐 내가 아픈 일이 너무 큰일 이었는데 그때 너무 많은 감정들을 한꺼번에 느껴졌다. 내가 그때까지 느껴본 감정의 종류들보다 더 많이 느끼고 소화를 못시켰던 경험이 있다. 너무 많고 복잡한 감정을 해석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도 하고, 해석이 잘되었는지 못되었는지 또 자기 검열을 해 봐야 하고, 정확한 감정의 길을 찾으려고 하니 애매모호한 감정의 길을 한번에 건널 수 없고 그 상황을 견뎌내야 해서 너무 어려웠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말을 잃어 버렸다. 말을 하려고 해도 꼬이기만 하고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없고 항상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지식의 구조 앞에 나는 홀연히 무릎 꿇을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배움을 해 나가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지적 장애가 생긴다면 그것은 그들의 능력부족이 아니라 정말 우리를 구성하는 것 중에 감정이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여 소화하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인지 과정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감정이 과잉이 되면 인지 기능이 마비가 되는 경우기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교사가 단순한 설명을 하거나 보충수업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학생이 정서적으로 안전하게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해석하고 지지를 해 주는 것을 필요로 한다.

    결론

    비온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학생의 감정의 과잉에 대한 이해와 그로 인한 사고의 정지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 배움의 힘을 어떻게 길러주는가?” 우리 나라의 교육은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가? 물어보고 싶은 대목이다. 이러한 의구심을 품고 쓴 책이 비온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기>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학생들의 감정과 혼란을 감당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알파 기능을 활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베타 요소는 학생들의 신체를 통해 그 작용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정서적, 관계적 지지를 해 주는 것이 곧 배움의 일환이며, 학생들이 진짜 자기를 만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교육에서 치유가 이루어 지려면, 우리는 정서와 사고가 연결되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그 연결이 가능해지기까지는 ‘모른다는 고통’을 함께 견뎌내야 한다. 비온의 교육은 그저 ‘생산성 있는 학습’이 중요한 것을 넘어 깊이 있는 인간을 성장시키는 교육으로 우리가 나아가도록 한다는데 그 의의를 가진다.

    참고문헌

    알프레드 비온(2012). 경험에서 배우기(윤순임 외 옮김). NUN.(원제 1962).

    파커 J. 파머(2024). 가르칠 수 있는 용기(김성한 옮김). 한문화. (원제 1998).

    [영어 요약]

    Bion asks us this question: “How does understanding a student’s emotional excess and the resulting suspension of thinking help us cultivate the power of learning?” In our country’s education system, emotions are not regarded as important—then how can students be given a genuine opportunity to truly learn? This is the question that arises. It is with this doubt in mind that Bion wrote the book Learning from Experience. In this book, we learn that it is essential to use the alpha function to help students endure their emotions and confusion and to enable rational thinking. Without this, the beta elements manifest themselves through the student’s body. Therefore, providing emotional and relational support to help students understand and express their feelings is part of learning itself and a way for them to encounter their true self. For healing to take place in education, we must help connect emotion and thought, and this connection requires us to endure together the pain of not knowing. Bion’s vision of education goes beyond mere “productive learning” and holds significance in guiding us toward an education that fosters the growth of a deeply developed human being.

    [일본어 요약]

    ビオンは私たちにこう問いかけています。”学生の感情の過剰さと、それによって思考が停止することを理解することは、私たちの学びの力をどのように育てるのか?” 韓国の教育では感情を重要視していませんが、そのような中で、学生に本当に学ぶ機会をどのように与えているのでしょうか?この疑問を抱きながら書かれた本が、ビオンの『経験から学ぶ』です。この本では、学生の感情や混乱を受け止め、理性的な思考ができるようにするためには、アルファ機能を活用することが不可欠であることがわかります。そうでなければ、ベータ要素は学生の身体を通してその作用を現します。したがって、学生が自分の感情を理解し、表現できるように、情緒的・関係的な支援を提供することは、学びの一環であり、学生が本当の自分に出会う方法なのです。このように、教育において癒しが実現するためには、私たちは感情と思考がつながるように支援しなければならず、そのつながりが可能になるまで「わからないという苦しみ」を共に耐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ビオンの教育は、単なる「生産性のある学習」を超えて、深みのある人間を育てる教育へと私たちを導くという点に意義を持っています。